여래사 3층에서는 명상센터가 있다.
불교, 힌두교 등 인도-네팔 지역에서 발생한 종교들은 요가, 명상 등 독특한 수행을 통해 진리에 이를 수 있다고 믿는다. 현재 전 세계에 퍼진 명상법은 불교와 힌두교의 명상법이다. 인도철학과 불교에선 dhyāna 혹은 선정(禪定)이라는 개념을 사용했다.
불교는 명상을 통해 스스로 진리를 깨달아서 해탈하는 것이 목적이다. 한국 사람들에게는 대승불교의 선불교에서 발전한 수행법 중 간화선이 유명하다. 간화선에서는 세속의 논리로서는 푸는 것이 불가능한 '화두'를 이용한다. 힌두교의 명상에서는 성스러운 소리인 만트라를 끊임없이 외게 된다.
오래 수행한 사람들은 명상을 통해 전생레드썬 혹은 죽음 이후의 세계, 눈에 보이지 않는 존재, 인간이 사는 세계 이외의 세계 등을 접할 수 있다고 주장하기도 한다.
고도로 발달된 명상수행체계가 있는 종교에서는 신도 혹은 수행자들이 명상수행을 하다가 저런 경험들을 보고하는 일이 있다.
불교에서는 저런 경험을 할 수 있는 특별한 능력을 신통이라 부르는데, 아함경이나 니까야에 따르면 석가모니 부처님 본인께서 신통의 최고 대가셨다. 하지만 불교에서 최고의 신통은 '모든 번뇌를 소멸하는 신통'이다. 즉 전생을 보고 타인의 마음을 읽고 지옥과 천상을 들여다보는 능력보다 자신의 모든 탐욕, 성냄, 어리석음을 완전히 제거하는 능력이 최상의 것이라는 이야기. 사실 이것이 불교 명상의 궁극 목적이기도 하다.
반면 대승불교 중에서도 선불교 전통을 따르는 한국 불교에서는 저런 존재를 일종의 황홀경으로 보아 인정하지 않으며 그러한 헛것을 타파하도록 가르친다. 저런 경험은 굳이 명상만이 아니라 최면 등[1]을 통해서도 경험할 수 있으므로 명상의 본연의 목적과는 동떨어져 있다고 판단하는 듯 하다.
초기 불교 시대의 명상법, 즉 석가모니 부처님께서 직계 제자들에게 지도했다고 믿어지는 명상법은 아함경이나 빠알리어 니까야에서 확인할 수 있다. 깨달음에 이르는 성스러운 여덟 가지 도닦음, 줄여서 '팔정도'에 따르면 불교 명상법은 다음과 같다.
우선 자신과 타인을 해치는 행위 중 우선 말과 행동부터 절제하는 훈련을 한다. 이것이 어느 정도 되면 말과 행동을 넘어 '해로운 마음'까지 일시적으로라도 가라앉히는 훈련을 한다. 이런 방법으로 가장 유명한 것은 호흡이나 특정 이미지(ex. 까시나[2]) 등에 마음을 모아 해로운 마음 상태를 일시적으로 가라앉히고 마음을 한 곳으로 집중케 하여 고요하고 정화된 마음상태를 만드는 것이다. 하지만 이외에도 시체를 관조하거나 자애, 연민 등의 마음을 꾸준히 닦는 등 다양한 방법(수행대상)이 있다. 자신의 근기에 맞게 수행방법을 골라잡으면 수행 진전이 빠르다 한다. 그 다음에 그렇게 정화되고 집중되어 아주 강력해진 그 마음을 이용, 자기 존재와 세계를 있는 그대로 보는 지혜를 계발하는 훈련을 한다. 이런 지혜가 수행을 통해 깊어지다 보면 어느 순간 어리석음이 모두 사라지면서 존재와 세계에 대한 모든 갈애가 영원히 끊어져서 해탈을 이루게 된다.
흔히 마음을 한 곳으로 모아 고요하고 집중된 삼매의 마음을 훈련하는 명상을 사마타, 세상을 있는 그대로 보는 지혜를 계발하는 명상을 위빳사나라 구분한다. 하지만 둘 다 팔정도의 일부로 명확히 구분되는 것은 아니다. 말과 행동을 단속하는 것은 계율을 지키는 것이라 하는데, 흔히들 '명상'에는 포함시키지 않지만 명상의 중요한 토대가 된다. 또 다른 중요 토대는 부처님의 가르침을 듣고 배워 익히는 것. 무엇이 나와 타인을 해치는 해로운 일인지, 무엇이 나와 타인을 이롭게 하는 유익한 일인지 알아야 계율을 지킬 수 있다. 그리고 위빳사나를 통해 지혜를 계발할 때도, 나와 세상을 어떻게 파악해야 있는 그대로 본 것인지 뭐가 정답인지 그 기준이 있어야 내가 본 게 맞는지 틀리는지 알 수 있다. 이것에 대해서도 부처님께서 가르쳐놓으신 것이 있다. 그러니 모든 수행에는 부처님의 가르침을 듣고 배우는 게 우선이다.
그러니까 큰 틀에서 보면 팔정도에서 제시된 불교 명상의 흐름은 부처님 가르침을 배워 바른 견해를 익히고 계율을 잘 지키면서, 이 토대 위에 삼매를 닦고 지혜를 계발하는 훈련을 하는 것이다. 이 불교 명상의 최종 목적은 모든 괴로움의 완벽한 소멸, 열반이다. 괴로움의 원인은 탐욕, 성냄, 어리석음이므로, 불교 명상의 목적은 탐욕, 성냄, 어리석음을 모두 제거하는 것이라고 해도 된다. 다시는 태어나지 않는 경지인 완전한 열반에 이르면 모든 정신적 고통도, 육체적 고통도 '영원히' 사라진다. 정신적 육체적 고통의 조건이 되는 정신과 몸이 다시는 생성되지 않기 때문.
위빳사나의 경우 20세기 미얀마, 태국 등지에서 행해지던 위빳사나 방법이 서양에 전파되는 와중에 서양의 정신의학계, 심리학계에서 그 방법을 가공, 변형하여 'mindfulness meditation, 마음챙김 명상'으로 보급함으로써 유명해졌다. 하지만 니까야에 전승되는 불교 교리에 철저하게 입각한 위빳사나와 서구 정신과나 심리치료 과정을 통해 접하게 되는 마음챙김 명상은 다르다. 애초에 같을 수가 없다. 명상의 목적 자체가 다르기 때문. 심리치료 과정등을 통해 배우게 되는 마음챙김 명상의 목적은 우울, 불안, 공포, 통증 등 마음의 장애(와 통증의 경우 몸의 장애.)를 제거하고 이 세상에서 더 행복하고 잘 살아가는 것이다. 하지만 위빳사나의 목적은 이 세상에 태어나서 존재하는 것 자체가 괴로움임을 깨달아 세상에 대한 모든 욕망을 제거하는 것이다. 명상 초반에는 마음챙김 명상이나 불교 위빳사나나 테크닉 적으로 비슷비슷하게 보일지 모르지만, 본격적으로 들어가기 시작하면 전혀 다르다. 가고자 하는 방향이 다르니까 어쩌면 당연한 이야기. 괜히 서양 정신과의사, 심리학자들이 불교의 위빳사나를 그대로 가져가지 않고 자신들의 목적에 맞게 변형, 개조하는 게 아니다.
서양에서 마음챙김 명상을 대중적으로 확산시킨 장본인은 존 카밧진(Jon Kabat-Zinn)[3]이다. 1979년 메사추세츠 의과대학에 마음챙김에 기초한 스트레스 완화(MBSR) 프로그램을 창안하여 지금까지 확산 일로에 있으며 성공적으로 운영하고 있다. 그밖에 미국의 대표적인 수행자로는 조셉 골드스타인(Joseph Goldstein)이 있다. <조셉 골드스타인의 통찰 명상>이란 책을 참고하면 그의 수행자로서의 자질과 면모를 확인할 수 있다. 그밖에 미국의 진화심리학자 로버트 라이트(Robert Wright)는 자신의 저서 <불교는 왜 진실인가>(Why Buddhism Is True)에서 인간이 괴로움에 빠지게 된 원인을 진화심리학적으로 설명이 가능하다고 하는 주목할 만한 주장을 하고 있다. 그에 따르면 인간의 마음은 원래 자기 유전자를 전달하려는 지상 목적을 갖는 바, 그러한 이유로 애당초 미망과 환영에 빠지게 설계되어 있다. 그리고 이 미망과 환영에서 벗어나 세계를 있는 그대로 명료하게, 지혜롭게 보는 방법으로서 불교 명상, 특히 마음챙김 명상을 권하고 있다. 적어도 위 세 사람의 서양 수행자는 불교에 대한 탄탄한 이해의 토대 위에서 명상을 직접 수련하고 소개하는 이들이다.